인터넷 서점에서 ‘재테크’라는 말을 검색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책들이 쏟아진다. 그 제목 또한 하나같이 유려하다. ‘재테크에 미쳐라’, ‘재테크가 평생을 좌우한다’ ‘재테크에 다시 미쳐라’ 등 재테크를 ‘운명’ 내지는 ‘삶’ 정도로 은유하고 있다. 과연 재테크는 우리의 운명이자 삶인가?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왜 자꾸 미치라고 하는 걸까?)
재테크가 가능한 이유
자본의 운동은 ‘자본→상품→자본’을 기본 코스로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해감에 따라 새로운 코스가 등장했으니 바로 ‘자본→자본’코스다. 자연이라는 생산수단에 인간의 노동을 투입해 상품을 만들고 그 상품의 가치를 화폐에 투영해 상품과 상품간의 교환을 용이하게 만든 것, 더 나아가 화폐로 생산수단을 사는 데까지 이르면 하나의 자본흐름이 완성된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중간과정 즉, 노동과 상품을 생략한 채 자본을 넣으면 자본이 나오는 마법이 가능하게 됐다. 우리는 이것을 ‘재테크’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재테크가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 이것은 화폐가 제대로 유동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업자본이 상품을 판매한 대금을 결제 기일까지 가지고 있는 것, 노동자나 자본가가 개인적 소비를 위해 돈을 비축해 두는 것 혹은 자본가가 다음 투자를 위해 일시적으로 화폐를 모아두는 것 등이 모두 움직이지 않는 화폐를 만드는 행위다. 금융기관은 이 화폐를 모아 대부 가능한 화폐로 전환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금융기관 즉 대부자본 덕분에 산업자본은 상품을 판매한 돈이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계속해서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신용’이라는 마술
대부자본은 이자를 수입으로 먹고 산다. 이자는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의 일부를 떼어가는 것이다. 고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없듯이 이자가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보다 더 클 수는 없다. 허나 자본의 욕망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이다.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가치총량보다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내기 위해 대부자본은 ‘신용’이라는 마술을 부려 ‘어음’을 만들어 냈다. ‘어음’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화폐로 돌려주겠다는 지불약속이다. 어음이 생겨난 이후로 더 이상 화폐가 부족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의 혈관이 막히지 않고 원활해 진 것이다. 가치가 화폐라는 자식을 낳았듯이 화폐는 또한 어음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수표, 채권, 각종 지불증서, 주식 등. 신용수단은 무한히 번식했다. 신용이 엄청난 팽창을 이룩했고, 이자소득 역시도 그만큼의 팽창을 가져왔다. 그야말로 재테크의 태평천국이 도래한 것이다. 종이에 적힌 숫자가 끝간 데 모르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었으니. 그 무한히 올라가는 숫자가 곧 ‘가치’라는 사실이었다. 가치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곧 종이에 기록한 수치와 가치 사이는 좁힐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져 따라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종이에 기록한 숫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공황이 온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 될 것인가
1637년, 투기수요의 한계 때문에. 모두가 들고 있던 신용수단은 그저 숫자가 쓰여진 일개 종이로 전락해버렸다. 1716년 존 로의 방크 루아얄 사건, 1852년 페레르 형제의 크레디 모빌리에 사건, 그리고 근자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 사건에 이르기 까지. 재테크와 이자소득의 환상은 그렇게 주기적인 파멸을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 보인다. 아직도 파멸의 유리조각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수행하는 삶을 동경해왔다. 아마 달라이라마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자기계발 서적이 영적 수행의 서적으로 대체된 이후로 나는 ‘어떻게 하면 잘 채울까?’에서 ‘어떻게 하면 잘 비울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우주와 섭동하는 존재처럼 느껴져 온 몸에 흐르는 피가 충만하다 못해 육체의 경계를 넘어 세상으로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 뿐이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자그마한 생채기를 비집고 나온 한 방울의 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뿐이다.
이런 밥 먹는 일 만큼이나 지겨운 반복. 책을 읽거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 수행을 하거나 스스로 명상에 잠기지 않으면 다시 현실의 관계망에서 발버둥치는 미꾸라지 같은 꼴로 영원히 미끄러져야 하는 걸까? 응.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영적성숙도는 콩나물과 같아 자주 물을 주면 줄수록 물은 빠져나가되 길이는 조금씩 자라나는 속성의 것이라 믿을 뿐이다. 그리고 평온이 지속되는 시간이 조금은 더 길어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나는 영적 성숙을 위해 일상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쪼개 할애한다. 적금 들듯이 말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적 측면과 명상적 측면을 모두 충족한다는 의미이다. 영적 안정에 이르는 길이 소설적 갈등을 경유하기 때문에 나에게 기존의 자극과는 차별된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코엘료의 책은 신선하다. 코엘료의 신작『알레프』는 성공한 작가로서의 그가 더 이상 영적진보의 과정을 겪지 못하고 일상에 붙잡혀 있음을 느끼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소설 속 코엘료의 나이가 쉰아홉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노작가들의 글이란 대개 세상을 향해 있거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쓰고 훈계라고 읽는다) 혹은 과거를 길어 올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헌데 코엘료의 이 책은 쉰아홉 소설가의 도전을 주제로 한다. 벌써 그는 노인이 아니다.
두려움과 떨림. 불만스럽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면, 신께서 그 마음을 여기 남겨놓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모든 것을 바꾸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 (31쪽)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진보를 의미하지만 굳이 방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보란 앞이 아니라 현재로 나아가는 것, 현재에 단단하고 굵은 말뚝을 박아 그것에 묶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코엘료가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 9288 숫자만큼 달린 것도 0이라는 현재에 이르기 위함이라고 단언한다. 나도 그렇다. 0이라는 현재에 이르기 위해 지금도 끝없이 숫자 위를 달리고 있다.
현재에 이르는 길, 하나 - 내 왕국으로의 여행
“작은 알레프는 언제나 우연히 나타납니다. 당신이 길을 걷고 있거나 어떤 장소에 앉는 순간, 갑자기 온 우주가 거기에 있는 거죠.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펑펑 울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는 겁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감동의 울음이죠. 스스로에게조차 설명할 길이 없긴 하지만, 당신은 그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는 중임을 알고 있는 겁니다.” (150쪽)
시간과 공간을 현재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소설에서와 같이 내 왕국의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내 왕국의 왕이 되지 못하고 노예가 되는 것은 일상에 잠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밥숟가락을 떠 입 안에 집어넣는 것.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 일정한 시간에 혹은 그보다 늦게 퇴근하는 것. 매일 보는 이들의 얼굴에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것. 일련의 모든 것들은 내가 나의 감각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내 왕국에서 쫓아내는 반란군의 역할을 한다. 나는 오롯이 내 왕국의 독재자여야만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코엘료가 말하는 작은 알레프의 영역에 들어갈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을 나만의 언어로 ‘시의 영역’이라 명명했었다. 아주 우연한 순간 내 모든 감각기관이 세상을 향해 열리고 세상은 내게 들어온다. 세상은 내 안에 들어왔다가 또 다른 내가 되어 밖으로 튀어 나간다. 그럼 세상은 온통 내가 되고, 나는 온통 세상이 된다.
이렇게 짧은 시간 작은 알레프를 경험하고 나면 나는 알레프에 있는 중에도 슬프다. 이 알레프가 곧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현재에 이르는 길, 둘- 관계로의 여행
중국 대나무는 씨를 뿌리고 나서 거의 오 년 동안은 아주 작은 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성장은 땅 밑에서 이루어진다. 복잡한 뿌리가 땅 밑에서 종으로 횡으로 뻗어나아가면서 형성된다. 그러다 다섯 번째 해가 끝나갈 무렵, 중국 대나무는 갑자기 약 25미터 높이에 달할 정도로 성장한다. (42~43쪽)
오랫동안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내려 나의 영역을 확보했음에도 우리는 늘 결정적인 한 가지를 걷어내지 못해 빛을 보지 못한다. 25미터에 달할 만큼 강한 동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 우리는 정밀한 어느 한 순간 타인에 의해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 힘의 원천은 ‘관계’다. 관계는 우정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좋은 관계는, 서로를 25미터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자신의 왕국에서 주인이 된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만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들의 만남이 노예들끼리의 만남이라면 그 만남은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그저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 상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 ‘나’는 여행 중 두 사람과 진한 관계를 맺는다. 한 명은 ‘야오’이고, 다른 한 명은 ‘힐랄’이다. 이 둘 각자의 삶도 한 권의 소설이 될 만큼 특별하겠지만 우리는 ‘나’의 시점으로 이 둘을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살피게 된다.
야오는 ‘나’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느라 오롯이 자신의 왕국의 주인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나’가 자신의 왕국을 찾아 나설 때만큼은 선뜻 가이드를 자처한다. ‘나’와 야오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거울이 된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빈 곳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 이 둘의 관계처럼만 누군가를 대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반목할 필요도 남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타인은 내가 가장 아끼는 거울일 뿐이다.
힐랄은 ‘찬바람이 불면 우정의 불을 지펴주겠다’는 ‘나’의 글을 보고 여행을 따라 나선 스물 한 살의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녀는 무엇보다 ‘나’에게 우정의 불을 지펴주고 싶어한다. 그녀의 부담스러운 들이댐은 나를 당황케 하지만 머지않아 ‘나’는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물론 각자의 매력에 기반하는 것이지만 좀더 우주론적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나’와 힐랄은 전생의 기억을 자신의 왕국에 현전해 그것을 그 자체로 감당하려 한다. ‘나’는 이미 아픈 전생의 기억을 공유한 여인들을 만난 적이 있지만 여태껏 그 기억을 현재에서 감당해 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 만난 여인 힐랄은 달랐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픈 기억, 혈전처럼 웅크리고 있는 슬픔을 힐랄과 ‘나’는 감당하고 결국 감내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각자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쇼팽처럼. 강물처럼.
“큰 알레프는 아주 강한 친화력을 갖고 있는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우연히 작은 알레프에서 만났을 때 일어납니다. (...) 그러니까 특별한 사명을 위해 운명이 선택한 두 사람이 적확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도 발생하죠.” (151쪽)
여정풀기
리뷰를 쓰는 지금이야 그때보다 자신 없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쯤 나는 확실히 현재에 도달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시종일관 현재시제로 서술되는『알레프』는 현재에 관한 책이다. 다만 코엘료는 억지로 독자들을 현재로 이끌지 않는다. 순례자는 자의적으로 인간본성을 규정해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지나온 길에 표지판을 꾹꾹 눌러 세울 뿐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자주 알레프가 나타나길 바란다.
모든 것은 여기 현재에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정죄하거나 구원하고 있어요. 우리는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가면서, 한 객차에서 다른 객차로, 하나의 평행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이동하면서,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구원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걸 믿어야 해요.” (250쪽)
블로그에 자주 글을 쓰겠다고 말한 지 2주가 넘게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약조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란 인간. 그런 인간. 뭐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필요이상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아니예요. 제가 보고 있어요.라는 말을 기대하며 읊조려본다.)
오늘의 ‘되는대로 책 리뷰’는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이다. 1년에 걸쳐 총 세 번의 시도 끝에 완독했다. 이상하게 김연수의 소설을 완독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내가 평균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소설에 비해 김연수의 소설이 좀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어려운 게 문제가 아니라 내 편견보다 어렵다는 게 문제다. 내 눈이 문장을 훑는 속도 면에서 일반적인 소설을 생각하며 눈알을 굴리다 보면 머리에 입력되어야 할 내용들을 놓치게 된다. 김연수의 소설에 대한 기준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좀더 수월하겠지.
<꾿빠이, 이상>은 이상에 대한 수많은 자료와 김연수의 상상력을 한데 녹여 주물한 세공품 같다. 소설에는 ‘100개의 퍼즐을 가지고 진짜보다 더한 가짜를 만들어내려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일은 죽음으로써만 가능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실제의 김연수가 이 소설을 씀으로써 진짜보다 더한 가짜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소설에 이토록 학적 성실성을 부여하다니 김윤식이 “2001년에 쓰여진 소설은 <꾿빠이, 이상>밖에 없다”라고 할만도 하다.
진짜냐, 가짜냐
김연수가 이상에게서 천착한 것 중 하나는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다. 이상이라는 실존 소설가에게 덧씌워진 전설이라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27살에 죽은 청년에게 대단한 것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냐는 말이 무색하게 어떤 老국문학자는 “27살에 죽은 청년의 문학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 전생애을 바쳤다.”며 한풀이를 한다. 이상은 실제로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는가? 이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소설에서는 전설의 진위여부의 문제가 무수히 난립한다.
한 문장에 불과한 이상의 죽음에 대한 주석이 이토록 길고 또 서로 상반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38쪽)
이상이 레몬인지 멜론인지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기 전 누군가 그의 데드마스크를 떴다. 하지만 그 데드마스크를 뜬 장본인이 길진섭인지 조우식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심지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조차 그 의견이 분분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는가란 의문을 갖지 말도록 하자.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이 훗날 제멋대로인 일은 우리에게도 부지기수로 일어나지 않는가.
이상이라는 빈 공간을 중심으로 수많은 진위논쟁이 번식한다. 또 그럴수록 이상은 더욱 베일에 쌓인 인물이 되어간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빈공간의 심연은 깊어진다. 소설 속 김연화라는 문학기자는 이 진위논란의 중심에 선만큼 중립적이다. 그는 호기심만으로 이상의 데드마스크에 접근한다. ‘데드마스크가 존재한다. 아니다’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 종류의 잣대를 들이대며 진실을 밝히려 하지만 진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데드마스크>의 김연화와 마지막 <새>에 이른 김연화는 같은 인물이지만 또 다른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가짜냐 진짜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말입니다. 진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정황이 진짜라면 진짜인 것이고 모든 정황이 가짜라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200쪽)
객관적인 포즈의 인간에서 흡사 종교에 빠진 인간의 몰골을 하고 나타난 김연화는 또 하나의 진리를 말해준다. 믿음에서 발로한 정황 만들기. 세상은 그렇게 진실을 이룩해나가는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믿음이 더 강하냐 또 누가 정황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드냐의 문제로 말이다. 하지만 이게 정답은 아니다.
“시에 너무 집중하면 공부하기가 힘들고 공부에만 너무 열중하면 시가 씌어지지 않습니다. 진실이란 결국 그런 것입니다. 열정도, 논리도 아닙니다. 줄타는 사람처럼 그 가운데를 걸어가야만 하죠.” (27쪽)
믿음이냐 객관이냐 무엇이 정답일까.
이상-되기
내가 본 이상의 해석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시인 이상과 생활인 김해경을 분리해 그 간극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 이상의 자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생활인 김해경의 존재는 사라져만 간다. 그에 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시가 뽑힌다. 마치 마법사의 모자 에서 토끼도 나오고 비둘기도 나오고 끝없이 묶인 색색의 천들이 나오듯 말이다.
<꾿빠이, 이상>에서 그려지는 이상 역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해석된 이상인 듯싶다. 어느 순간 김해경은 이상을 창조했고, 이상의 삶을 살아간다. 호기 있는 변종. 새로운 인간형. 그의 해괴망측한 시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이 그저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정말 천재 시인인지를 의심한다. 그를 직접 본 후 그의 기행에 인위성이 묻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은 믿을만한 천재이고, 그 반대라면 역시나 단순 허세에 쩔은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김해경 역시도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을 동경한다. 종국에는 그를 감당하는 것마저 버겁다. 김해경 말고도 이상을 동경하는 인물이 또 있었다. 어린시절 우연히 이상을 보고 그에게 흠뻑 빠진 서혁민이란 인물이다. <꾿빠이, 이상>의 추리적 요소는 평생 이상의 시를 넘어서 이상의 삶을 동경해 그의 삶을 통째로 흉내내다 일흔 세 살에 일본에서 죽음을 맞이한 서혁민에게서 나온다.
김해경이나 서혁민이나 둘 다 이상이라는 빈 공간을 좇다 지쳐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것을 시도하다 추락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상의 사도들이 만들어낸 인간적 흔적을 찾아 2차 고민들을 양산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기에 덧붙여진다.
김연수의 소설 중에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라는 소설이 있던가. 난 그 소설을 보지 않았지만 <꾿빠이, 이상>은 흡사 가면이라는 소실점을 두고 무수히 많은 선들이 점을 향해 도열해 있다는 느낌이다. 헌데 아무리 가면을 가리키며 걸어봤지 가면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가면을 원한다면 자신이 가면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는 글을 베껴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이상의 삶까지 흉내냈다. 그건 자기 삶을 판돈으로 거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문학작품의 아류는 쉽지만, 삶의 아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75쪽)
이상은 왜 위대한 작품을 남겨 불멸하게 됐으며 서혁민은 일흔세 살이 되어 무명 작가로 죽게 됐는가? (87쪽)
전기 작가는 대상 인물이 가치 있는 삶을 향한 의지를 잃지 않았다는 증거가 이어질 경우에만 계속 써나갈 수 있다. (106쪽)
예를 들어 이상이 총독부 기수직이라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금홍과 함께 다방을 차리겠다고 나설 때, 후세의 전기 작가들은 두 손을 들고 환영한다. 이상이 창문사에서 교정을 보다가 김기림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창 밖으로 피가 섞인 침을 뱉을 때, 전기 작가들은 이미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써내려갈 태세를 모두 갖추게 된다. (106~107쪽)
그러니까 김해경은 폐병 걸린 이학박사 지망생이라는 운명을 거부하고 총독부를 뛰쳐나와 기행을 일삼는 작가 이상이라는 의지를 택한 셈이다. (129쪽)
김해경은 죽으면서 잃어버린 꽃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비밀, 김해경이 죽어 이상이 되는 그 비밀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가난하지도 허전하지도 않게 됐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도쿄에 와서 죽는가?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내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서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라고 쓰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내가 죽어 영원히 이상으로 다시 사는 길이기도 하다. 내 오랜 꿈. 이로써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166쪽)